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李德懋의 관직 활동 - 검서관 학술업무와 本職 수행을 중심으로 -
초록
李德懋는 1779년(정조 3) 규장각의 外閣인 校書館의 檢書官으로 임명되며 관직 생활을 시작하였다. 1781년에는 사도시 주부에 임명되어 처음 본직을 받았다. 이후 그는 검서관 또는 겸검서관을 맡으면서 중앙과 지방의 여러 관직을 역임하였고, 지방관으로 근무할 때도 검서관직을 겸임하며 서울과 지방을 오갔다. 이덕무의 관직 활동에서 더 큰 비중을 차지한 것은 본직보다 검서관 업무였다. 검서관의 핵심 직무가 국가의 편찬사업이었다는 점에서, 이덕무의 관직 활동에서 가장 중요했던 것은 학술업무 수행이었다. 관료 이덕무의 학술업무는 크게 편찬 관련 업무와 撰述·應製 활동으로 나누어 볼 수 있다. 국가 편찬사업에서 이덕무가 맡은 일은 두 가지였다. 하나는 정리된 원고를 교정·교감·필사·정서하거나 간행 시 監印하는 일이고, 다른 하나는 자료를 수집·정리해 원고를 작성하거나 기존 초고를 편집·재정리하는 일이었다. 전체적으로는 전자의 비중이 컸으며, 특히 1779년부터 1788년까지는 검서관 본연의 직무인 교정·정서·감인 업무가 대부분이었다. 그러나 1784년부터 진행된 御定宋史筌 개정을 통해 이덕무는 정조로부터 편찬 능력을 인정받았다. 이에 따라 1789년 무예도보통지 와 해동읍지 편찬 참여를 기점으로 자료 정리와 원고 작성 등 적극적인 편찬 업무의 비중이 커졌다. 撰述은 공적 업무로 특정 주제의 글을 짓는 활동이다. 이덕무의 찬술 저작은 대부분 정조의 명에 따라 이루어졌고, 내용 역시 정조의 치적과 활동을 기리는 성격이 강했다. 應製는 정조가 내린 試題에 따라 글을 짓는 시험 형식의 활동이었다. 이덕무는 총 11차례 응제에서 4번 수석을 차지하는 등 대체로 우수한 평가를 받았다. 다만 1792년 7월의 책문, 특히 「文字策」은 정조와 전·현직 제학들로부터 혹평을 받았다. 이는 전통적 文風에서 벗어나 새롭고 사실적이며 개성 있는 표현을 추구한 이덕무의 문체가 정조와 기성 관료들에게 기괴하고 순정하지 못한 것으로 받아들여졌기 때문으로 보인다. 이덕무는 1781년 사도시 주부로 처음 본직을 받은 뒤 1793년 사망할 때까지 중앙과 지방의 여러 관직을 역임했다. 비록 관직 활동의 중심은 검서관 업무였지만, 본직 수행도 형식적이지 않았다. 그는 광흥창 주부로 근무할 때 ‘일을 감당할 만한 인물’로 인정받았고, 사도시 주부 재직 시에는 문장 능력과 행정 능력을 겸비했다는 평가를 받았다. 또 사근도 찰방으로 세 차례, 적성현감으로 열 차례 등 총 13번의 지방관 포폄에서 모두 最를 받았으며, 적성현감으로 60개월의 임기를 채웠다. 이는 이덕무가 지방관의 자질을 갖추었으며 직무 수행에 충실하게 임했음을 잘 보여준다.
키워드
- 제목
- 李德懋의 관직 활동 - 검서관 학술업무와 本職 수행을 중심으로 -
- 제목 (타언어)
- A study on Yi Deok-mu's Official Career Activities – Focusing on His Scholarly Work as a Geomseogwan and the Execution of His Primary Duties –
- 저자
- 강문식
- 발행일
- 2026-06
- 유형
- Y
- 저널명
- 진단학보
- 호
- 146
- 페이지
- 319 ~ 356